부서진 룩의 반격 잡담

오늘날 기대한 적 없는 기사문학의 철저한 인간적 추구. 끄적인 것들을 채색해보고 싶지만 재료가 없어 우울하다. 눈 아픈데 내비둘까.







―아, 내 인간성 쓰레기....... 아무래도 록필드 공방이 가장 재미있어... 고슬링 저택에서 주인공의 독백을 빌려, 이해 잘되고 어렵지 않음. 두들기고 썰고 부수고 던지고... 냉병기로 이러쿵 저러쿵 더 했어야하는데.


―검 쓰는 장면 글로 좇는 게 이리 즐거울 줄은 미처 몰랐다. 움직이는 어휘가 좋아서 품새마다 꼼실꼼실 들썩였다. 환영 연회에서 용병을 상대하던 조그맣고 날랜 동세, 해질녘 늙은 사자와의 대련, 바람처럼 날라오는 요하바라 기사수련생의 옷자락과 적의없이 목숨을 다툰 기사단장과의 결투, 주타드 전장에서 쩡 부딪혀오는 도끼에 날 사리는 감각이 와닿아서 설렜다. 기본적으로 한손검이라곤 생각하지만, 프롤로그 같은 상황은 두 손으로 쥘 듯 한데...십자군 즈음의 한손검술은 복원성과도 부족하고, 정점의 양손장검은 한손에도 무리없는 균형이니 막연히 겁나 멋지게끔 상상하고 만다. 그래도 연무장에서 혼자 수련하는 정도라면 확실하게 그려진다.


―틈틈히, 주인공 성격버린 태가 나는 게 왤케 좋지...그럼에도 구름을 동물 모양으로 보는 심상이나 꼬나쥐었다는 우울하고 자조적인 표현, 빌어먹을 새와 접시가 사랑스럽다. 선택적인 양심과 무거운 허무, 한 인간을 이 세상보다 사랑한 극단적 낭만주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든 질문에 다시 뛰어드는 억누를 수 없는 영혼의 모순. 가끔 아, 정말 머리쓰기 싫어하는구나 싶은 대목이 나오지만...귀여워. 달빛처럼 신묘하게 움직이며 머리보다 빠른 몸을 갖는 건 어떤 느낌일까. 얼마나 가볍고 싱그러울까. 철퇴가 곤란했던 적 없다던 여상함도 멋있어. 독자 뿌신다!(종려나무 가지 흔들)


―크고 거칠고 실용적인 발론성. 짓기 쉬운 사각망루일까 구석에 낙서한 걸 지나가던 S가 보더니, 그 쪼가리가 내 사후 공개하기 알맞은 기록이라며 호들갑 떨었다. 원형망루 그저 심미적 선호인 줄 알았는데, 시야각 및 구조적으로 방어에 보다 유리해서 유행한 거란다... 실용의 어여쁨을 몰랐던 내가 한심하다.


―거듭 읽으니 새삼 위화감이 드는 게, 란슬롯의 선례가 있고, 사실상 혈연관계가 아니라해도 일단 형제 간에, 상당한 수위인데 되게 아무렇지도 않게 모호한 채로 읽어넘겼네...그래놓곤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와 [아나킨 스카이워커]에서 그만 읽을까 멈칫했다니. 전자는 앞으로 연애 비중이 많은지 걱정되어서, 후자는 진지하게 읽을 게 아닌가 놀라서.


―역사에서 정치적 의도와 실리로 해석하는 사건을 로망으로 전환하는 정치적 감각을 가진 로망 속 인물! 심지어 신분도 엄히 따지지 않음. 애가와 영웅담 둘다 좋아한다니, 허허 줄 서야지. 얼마나 많은 사기꾼으로부터 영혼을 감싸는 밤에 굽히지 않고 분노와 눈물을 넘어 희망을 꿈꾸게 하는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던가. 가엾은 반...


―귓가에 체크가 들릴 때면 각 상황에서 인물이 어떤 기물로 어디에 있을지 생각하곤 했다. 백의 킹은 롯시, 충성의 방벽과 소년검사는 나이트, 그리고 향후 몹시 중요한 폰들...정직하고 단순한 룩은 발에 채이는 마이너피스를 빨리 치우고 싶을 뿐 게임에 올릴 생각도 없지만, 그가 간과하는 동안 새로 판 위에 올라간 숨쉬는 말들은 능동적이다. 그는 자책하지만 이들에겐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선과 방벽을 구축하며 중앙을 다투는 게임의 규칙을 스스로 감내할 의지가 있다. 버려진 비숍인 줄 알았던 폰과 끝까지 전진하여 메이저피스로 승격한 폰을 누가 기대했을까. 서로의 파멸을 준비하며 백은 어떤 기물도 잃지 않으려 발버둥치지만 운명을 부수려는 흑은 필연적으로 가차없을 뿐. 검은 왕이 백의 간절한 소망을 벗어나는 건 의무이다. 킹은 스스로 체크메이트될 수 없기에 게임의 끝에서 기다린다.


―형장의 노래부터는 쉬어가지 않고는 못읽을 상황의 연속. 어떻게 될지 알아도 힘들다.


―주목할만한 이름은 영어권이지만 비레사, 소비온, 이스크 같은 작명은 너무 예쁘다...특히 수도 이름은 황홀할 정도.


―간간한 풍경묘사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눈에서 내면으로 환기, 평소 선호하는 영국 수필체(?)와 다른 문체인데도 그같이 좋다. 누구나 손꼽을 대목 외에는 밉지않은 거위라든가, 혼바트 시절 주인공과 연꽃 위의 개구리 문단의 정서가 좋다. 사소한 순간조차 한 인간의 생애로서 의미를 갖고, 웅덩이에 처박힌 사금파리처럼 뜻하지 않은데서 운명적 전조가 반짝인다. 천사와 미래, 상이자 처벌인 생일 선물과 뱀의 혀처럼 갈라진 두 갈래 길, '나를 부르는 폭풍우'와 세번째 서임식, 로데오와 승격을 거쳐 물림되는 역사의 트리니타스, 고양이...크고작은 숱한 대조와 상응이 교차하며 주제를 긴밀히 연결한다.


―상대가 뻔함에도 "체스 둘래?"하는 게 설레면서도 웃겼는데, 할말 없으면 차 마시겠냐고 묻는 내 버릇이 문득 떠올라서.


―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고전적인 방법~ 이후 오랜만에 꿰였다. 균형을 앗아간 결정문은 예상 밖에, 가장 좋아하는 대사도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주인공의 시선에 동조하면서도 늘 그에게 이입했다. 대놓고 매력을 몰아준 마키아벨리 계열은 기준에 차지 않고 캐붕나기 쉽상인데, 그의 사고원리는 충분히 멀지 않게 그려진다. 감정과 충동을 주시하는 의식과 불안, 무차별한 수단화와 엄연한 규칙성, 도달하지 않은 과거의 자신과 겨루는 운명, 최선과 무회의 일치...자질구레한 소품도 궁금하다. 애지중지한다는 체스는 뭘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차를 어떻게 즐기고, 다기는 무엇을 쓸지, 표리부동한 낯에 곧은 눈, 선도 죄악도 믿지 않는 거침없는 흑의 행마, 제왕적 3/4박자 선율이 어울리는 걸음걸이, 찻주전자를 기울일 때면 뚜껑을 지그시 누를 손마디를 상상한다. 연약한 살덩이에 담긴 필멸의 존재가 세계를 가름짓는 유구한 방식, 체크당한 킹의 무의미한 한칸에 게임 밖으로부터 다가온 기회도.


―책에서 볼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지만, 지도에서 그의 자취를 손끝으로 짚고픈 바람은 하찮은 의문들―수더리 수염 기르나 폴레트 머리모양은 구식일까 등의―이 진눈깨비 속에 사그라들고 정적이 내려앉은 후에도 다시 기어나온 부질없는 덕욕. 발론이 모리겐티아와 접한 북서부 변경, 동부는 대륙의 끝이랬으니 바다겠고, 동부 국경이라는 플로아가 혹시 흑해나 파나마 비슷하게 끼고 있는지 궁금하다. 리르모도는 아뮬렛을 얻었던 하천 너머 북쪽 방향으로 일단 추정. 고슬링행 때 두통 와서 대충 읽었더니 비레사가 중부 중앙에 있는지, 치우쳐 있는지, 스트라텐은 어느 방향인지 아리송하다. 나중에 다시 봐야지. 비레사 삼면이 고지대로 둘러싸인 평야라 했던 것 같은데, 록필드와는 방벽 방향의 대로가 연결되는 건지 아니면 삼면 사이의 길목인지 베투아르와는 어찌 접하는지...요하바라를 가로지른다는 강이 어떻게 생겼으며, 모검 골짜기의 둑은 어디쯤인지, 나름대로 대강 그려서 만족하려했는데 일개 독자가 고민해봐야 몰라. 젠장.


―일상적으로 평이하고 자연스럽게 중세적. 사냥대회 리본달린 화살과 종자들 나왔을 땐 레알 두근두근했다. 주인공 시점에서 알 수 없는 정보를 액자식으로 끼운 고풍스런 방식이나 건반악기라 퉁치는 세심함도 좋고, 등을 맞대는 동작이 있는 느린 춤과 우마차가 다니는 침울한 야전 묘사도 소중하다. 심지어 판금 아닌 사슬갑옷 중세. 그래서 시종의 희고 곱실한 가발은 좀 의외였지만. 이상한 모자를 만들 필요는 없지. 시대물이라해도 취향이 다 나오는 이야기는 드물다. 요새 이런 걸 어디서 보겠냐고.


―눈송이들의 투신과 성문으로 이어지는 서술도 달빛검의 종장 못지 않게 아름다웠다. 달과 별도 좋지만...낮이 얼마나 찬란했는지는 밤이 되어야 안다. 포착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흔적. 쥘 수 없는 영원이 빛처럼 멀고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자기파괴 본능에 병행하는 고통은 생존의 방어기제로 묶여있다. 죽어가고 있다는 인지만이 생을 근거하는 상황에서 굳이 고통을 지속하길 택한다면 그건 이 지상에서 죽음의 질량이 죽음보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책과 관련한 글쓰기를 몹시 싫어하는데 여기저기 떠벌거리고 있다. 뭔가 아니다...토니오 크뢰거는 "왕은 울었어"하고 영업했지만 나는 여기서 침묵해야 옳다. 감정을 상상해낸다는 건 어쩌면 그렇게 교활한가. 부활주간 종교방송에 멈춰 [3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니다]에 울먹이는 비신자인 한편 비실재성을 방패삼아 타자의 고통을 낭만적 유희로- 생 만큼이나 엄연하고 절대적인 죽음의 선형에 경도되거나 차가운 분리감에 취해 부정한 기쁨을 누린 찬미자로서 나는 평소처럼 좋아야할텐데, 와 잘 읽었다 하고 이야기를 덮고 신나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수없이 이야기를 소비해온 심장이 가라앉는 무게가 낯설다. 고통과 슬픔은 여전히 타자의 것이었으나 침묵은 지켜보는 자의 몫이었다. 이루말할 수 없는 의식의 함몰을 느끼며 우두커니 침잠해 있었다.

...한스 한젠 역시 토니오의 영업이 부담스러웠을테니 저마다 이견이 있겠지만, 모르고 살았을 좋은 작품을 제때 읽어 족하다. 깨졌으면 그 룩은 끝났구만 걔가 뭘 어떻게 반격하냐 신경쓰였음에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소개말에 물러서기를 3번, 본문도 보지 않고 눈을 사렸으니 새삼 망작만 거른 게 아니다. 판타지를 거의 읽지 않아 이에 준하는 작품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나, 크레티앵의 로망으로 떠오르고 맬러리의 아서왕으로 저물었던, 현대엔 그 의미가 바랜 기사문학이 근본없는 일회성 장치를 딛고 개인적이기에 본원적인 인간성의 치열한 추구로 새로 쓰여졌음은 알겠다. 나는 내일이 왜 오는지, 인간이 무엇을 좇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시없는 시간을 돌아보면 내면의 절실한 지향을 따라간 점들을 잇는 선이 있다. 자취는 바뀌지 않지만 의미는 선택할 수 있다. 반대로는 불가하다. 제목에 붙은 약자가 무슨 뜻인지 알지만 막상 봤을 땐 '블?'하고 말아서, 어디에 추천 갈겼다가 주의 표시 안했다고 지적받아 재고해봤는데, 어쩐지 록필드가 불타지 않더라니 솔직히 이 소설은 내가 읽을 만한 수준이 아닌 것 같다. 언제나 찾길 바랐고 기다렸던 작품이다. 그에 관해선 닥칠 필요가 없다. 평소 시간을 돌린 주인공들이 왜 늘 후회하는지 모르겠다고, 갖은 시도가 소용없음을 확인하면 차라리 후련할 거라 여겼던 것도 잊은 채 함께 탄식했다. 현재 리더기 상태로는 한국 ebook 못보니까, 그냥 책 사야할텐데, 펭귄출판서처럼 가벼웠으면. 디자인에 삼각형 들어가면 프리메이...(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