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나우티카, 소년에서 꽃뱀으로

질색이다. 영웅이며 그 많은 인원하며 징그럽다. 그냥 두면 평생 읽지 않을 종류의 책. 주제도 내용도 철학도 사료적 가치도 생각하기 싫다.  감상만 쓰면 마음가는 부분 몇 추려서 풀어내면 되지만, 줄거리 요약까지 하라니 본격 머리숱이 줄어.

1. 멧돼지는 역시 킹왕짱임을 다시 확인, 그리스의 멧돼지는 크고 강려크했다.
2. 케이론은 이아손에게 뭘 가르쳤는가
마성의 청년같으니라구 여신들의 총애를 받고 빌어먹을 항해를 함께할 영웅을 49명이나 모았다. 저 49명은 항해 따위 괴롭고 싫지만 '영웅이기에' 자진하여 따라온 바보들이다. 명단 대충 넘겨서 정확히 몇명인지는 모르겠다. 틀리면 알려주든가. 이게 무슨 유비의 눈물도 아니고, 이 오뒷세우스의 조카 쯤 되는 녀석이 곤란한 얼굴로 말하면 남녀노소 종족초월하여 도와준다. 번역서 부제가 "소년에서 영웅으로"인데, 골 때린다.


3. 신들의 선물 메데이아
신의 자손이며 여신들의 신탁으로 신들의 선물 그 자체인 그녀는 판도라와 같이 아름답고 파괴적이다. 신들의 선물 따위 안 받는 게 나은데, 망할 신화 속 인물치고 선물 물리는 놈 못 봤어 젠장.
4. 저자 아폴로니오스
이 아폴론 팬순이가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했더니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장으로 왕자의 가정교사까지 역임한 고매한 학자......라네.
진짜 무슨 의도로 이런 팬픽같은 걸 썼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취향 밖이라 무슨 말을 해도 곧이 생각할 수가 없어.


결론을 내리지 못했음을 숨기려는 필사적인 삽질로 나열된 그 마지막 뚱딴지 같은 문장들을 내가 얼마나 비참한 심정으로 썼는지 숨겨지지 않는다. 아놔 카륍디스와 스퀼라 사이에 배를 띄워서 뭐 어쩐다고...?



─운명과 세계, 경계의 연속

 고대 그리스인에게 있어 운명은 정해진 구역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며, 이는 신 조차도 따라야할 불문율이었다. 아르고 호의 영웅들은 운명이 돌아가는 경계를 지나는, 밉살스런 노역을 지고 운명과 마주한다. 펠리에스에게 내려진 신탁은 아르고 호의 모험을 이미 그들의 구역 안에 갈무리해두었던 것일까? 날 적에 이미 자신이 이 모험에서 귀향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는 예언자 이드몬의 태도는 매우 인상적이다. 운명을 피하려 이에손에게 모험을 종용하지 않았다면 이올코스 땅에 오지도 않았을 메데이아로 인해 이후 파멸하는 펠리에스와 대조적으로, 그는 예지에 따른 죽음을 피하려하지 않으며 이 모험을 자신의 구역을 벗어나는 것이 아닌 본래 정해진 운명의 영역으로 여겼다. 그는 전사들이 흔히 그렇듯 여생보다 명예를 중시 하였지만, 그에게 있어 명예란 단지 아르고 호 모험의 협조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새김이고, 그 이상 욕심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목표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자신의 본분과 의무를 다하고 세상에 경거망동하지 않으며 그저 운이 따라주기를 기원하는, 곧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한 모습은 플라톤의 국가론이나 그리스 신화 여러 일화에서 엿보이는 운명관이 권하는 이상적인 자세로 여겨진다. 이드몬은 일리아스의 영웅들처럼 물러섬 없이 죽음에게로 다가간다. 그는 적에게 죽거나 바다에서 죽는 것을 차라리 영광으로 여기는 그리스인들의 가치관에 부끄럽지 않게, 신화 속에서 강력한 괴물로 등장하곤 하는 어마어마한 멧돼지를 그 운명의 숙적으로 맞았고, 아르고 호로 옮겨져 동료들의 팔에 안긴 채 숨을 거둔다.

 단지 영웅들 앞에 있을 모험만을 충고하지는 않는 듯한 피네우스의 예언은 2부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한 부분이다. 노아에게 때를 알려주었던 비둘기처럼, 피네우스는 퀴아네아이를 보거든 먼저 비둘기를 날려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안전하다면 더 이상 그 길을 피하지 말고 노를 굳게 잡고서 바다의 좁은 길목을 가를 것, 일리아스 15권 741행의 변형인 ‘삶의 빛이 손의 힘에 있는 것만큼 기도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조언 또한 인생의 갈래에 대한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하여 가벼이 들리지 않는다. 오뒷세이아 초반에 달린 텔레마코스의 모험과 같이 아르고 호 이야기를 일종의 성장담으로 받아들이는 견해는 그럴 듯하지만, 이로 인해 주인공 이에손이 성공적인 성장을 이루었다고는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고전기 이후 사람인 저자 아폴로니오스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기에 그 영향에 따른 해석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신화 속의 영웅들은 고대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 신분부터 특출나서, 날 때부터 영웅으로 태어나 영웅스런 일화를 남기고 영웅임을 증명하는데, 이에손의 경우도 배에 탈 때부터 이미 ‘소년’영웅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이에손이 영웅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는 건, 흔한 영웅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비범한 비극의 주인공이 될 준비를 마쳤다는 정도로, 오늘날 독자가 흔히 떠올리는 정의로운 영웅상과는 거리가 멀다. 과연 이 소년영웅은 이올코스를 떠나기 전 소년적인 정신 그 이상의 성장을 이 모험에서 이루긴 한 것일까? 이에손의 영웅적인 자질이 타고난 매력(신께서 부여한)을 이용해서 이성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면, 그는 이 자질로 인해 모험에서 큰 수확을 이루었다. 그리고 작품 내에는 채 나오지 않았지만, 이에손은 또다시 위기상황에서 또 다른 여성을 매혹하여 그 도움을 받기 위해 메데이아를 버리는데, 이는 현대 기준으로 꽃뱀 쯤이고, 고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갖은 고생을 하며 온갖 이상한 곳에 다 가보았다고해서 사람이 어른으로서 성숙했다고 판단하기는 부족하다. 이에손을 후원하는 아폴론도 마찬가지다. 청년들의 왕과 같은 그는 그 스스로도 성장을 마치지 못한 영원한 청년 신이다. 아폴론이 귀향한 영웅들을 축복하여 모험으로부터 이제 풀어주었다고 해서 그들 인생의 항해가 끝나는 건 아니다. 영웅들과 이에손의 삶은 그들이 살아가는 한 여전히 “경계”의 연속선 상에 있다. 신에게도 엄정한 운명의 경계 위에 스튁스가 놓여있다. 그 강은 죽음을 거쳐 흐르고 바다로 합류하여 항해하는 길마다 마주친다. 피네우스의 고통과 많은 영웅들의 죽음이 증거하듯 이 경계선 상에서는 신적인 지혜나 신분에도 그 약속이 없다. 이에손과 메데이아 사이에 에로스가 가진 상징성 또한 경계를 넘나드는 자로서의 운명적 위험을 암시한다. 이에손은 모험을 떠나기 전 한짝 신을 신은 모습과 마찬가지로 귀향 후에도 그 신분이 확보되지 않는다. 작품 밖에 이미 정해진 대로 황금양털가죽에도 펠리에스는 그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메데이아와의 파국 또한 그가 사랑에 서툰 청년 신 아폴론에게 여전히 속해있는, 경계선상의 ‘어른’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미완의 주인공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로마 고전 작품 내에 공존하는 현대성을 느낄 수 있다.

 시대를 앞선 듯한 이에손의 캐릭터는 분명 매력적이다. 능력자로부터 마음을 얻는 것이야말로 뛰어난 영웅 자질이라는 식의 영웅상이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평범하고도 비범한 주인공(이 약한 모습은 동료들을 떠본 것이긴 하나 반쯤 진담이었을 거다, 전쟁을 좋아하고 무술이 뛰어나다는 묘사가 있음에도 그는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등과는 달리 혼자서는 자신이 없다), 암시 상으로나마 가장 큰 조력자가 이후 적이 되는 것도 이후의 많은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무랄 데 없이 예의바르고 언변이 뛰어난 이에손은 여신들의 총애를 받고 영웅들을 모은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 이에손은 소피스트의 교육을 받은 궤변가인데, 과연 그런 교육이 있었으리라 생각될 만큼 아폴로니오스의 작품 내의 그 또한 청년답게 조심스러울지언정 한 번도 말실수를 한 적 없는 부드러운 달변으로 언제나 외교적 중책을 맡는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임을 강조하며 자신을 낮추고 그 어떤 충고와 도움도 마다않고 최대로 받아내려는, 드문 설득력을 지닌 인물이나, 아직 어리고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의 추방 소식을 알리는 이에손을 냉혈한처럼 묘사하지만, 아폴로니오스의 작품 내의 이에손은 메데이아에게 진정성이 있긴한데 다소 마지못해 보인다. 그는 항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업적을 이룰 것 같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영웅이지만 영웅이 아니었지 않은가. 본래 민화에서 유래되어 평범한 뱃사람들이 주인공이었을 이 이야기가 영웅담이 된 것은 개인적으로 다소 유감스럽게 생각된다. 인물들의 출신과 성격이 주어지면서 각각의 내용에 깊이가 더해지긴 하였지만, 이 모험의 일화들이 평범한 인물들이 겪는 위기와 고난이었다면 그 항해의 의미는 오늘날 더욱 새로이 조명되었을 것이다.

 이에손에게 영광을 준 모험은 그 영광을 바래게도 한 그런 것이었다. ‘영광과 명성’을 탐하는 젊은이들을 시험하는 이 인생과도 같은 경로를 가진 여행은 작품 내에서 이미 ‘황금양털가죽’에 이상의 다른 것을 잃는 그런 성질을 지녔다. 다른 영웅들의 희생과 빛과 같은 여신들의 축복에는 신들의 선물이 지닌 그 불행과 어둠이 엿보인다. 그들은 기꺼이 갤리선의 노를 직접 저었던 마지막 영웅들이었다. 틈틈이 영웅들이 올리는 제사 장면에서 우리는 그리스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꺼려지는 것 또한 두려워하며 섬겼던, 세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그리스인들의 관념에는 모든 것에 대한 염려와 주의, 해학이 녹아있다. 그들은 순간을 감사하고 신께 영광을 돌린다. 흥미롭게도 지중해의 신화와 이야기들은 북구의 것과는 정서가 다르다. 고대 북유럽인들이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내세가 행복하리란 믿음없이 다소 황폐하고 우울한 세계관을 지녔다면 그리스에는 엘리시움 같은 것도 있고 빛나는 별자리의 기념도 있다. 그들의 바다와 세계는 아름답고도 위험한 매력을 지녔고 흥미진진한 모험을 숨기고 있었다. 일리아스에서 불같은 무혼과 명예에 목숨을 바쳤던 영웅들이 오뒷세이아에서 재회했을 때, 그 어떤 사소한 삶을 살더라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고 말하는 장면에는 다양하고 활기찬 그들의 인생관이 깔려있다. 오뒷세이아와 아르고 호의 여정에는 이와 같은 세계에서 일어난, 그리스인들이 느끼는 생생한 현장감이 있다.

 오뒷세이아와 아르고 호 이야기의 유사성은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오뒷세우스와 이에손의 유형은 현대적인 영웅이란 점 외에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오뒷세우스는 한번 저지른 실수는 다시 저지르지 않는 신중함을 보이며, 쉽사리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지도자로서의 위치도 흔들리지 않는다. 노련한 어른과 아직 한참 배워야할 청년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오뒷세우스는 귀향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성장한 아들과 부인, 여생을 누릴만한 왕국이 있고, 작가 또한 서술로는 그의 손실을 면책했다. 아르고 호 이야기의 훈훈한 결말도 과제를 마친 청년들의 성인으로서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 같지만 언급되지 않은 남은 이야기는 비슷한 여정을 거친 오뒷세이아에 비하면 이 작품을 물음표로 가득한 다크판타지로 느껴지게 한다. 그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그는 아직도 경계선 위에 있지 않은가. 그의 선택은 쉬운 길로 빠져서 타락한다. 이에손은 그가 신들께 맹세한 도덕보다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안정을 택했다. 메데이아 역시 이성보다 감정적인 면이 우세하다. 그녀는 북구 서사시의 크림힐트처럼 극단적이고 용서가 없다. 경계를 넘나드는 에로스에 의해 메데이아는 그녀의 가족을 넘어 이에손에게 갔었다. 그녀는 이에손을 가족보다 사랑하여 동생 압쉬르토스를 살해하도록 했고, 펠리에스에게도 그러했다. 결혼과 가족을 수호하는 여신 헤라는 그녀가 다른 이들보다 차별하여 총애했던 이에손이 아르고 호 때와 같은 방법으로 또다른 성공을 거머쥐려 도덕의 경계를 넘었을 때 그를 저버렸고, 메데이아는 콜키스에서처럼 또다시 ‘경계’를 벗어나더니 끝내는 인간과 어머니로서의 자신을 버렸다. 처음 메데이아를 만났을 때 그가 약속한 대로 그녀는 훗날 동방 어딘가에서 ‘전적으로 여신과 같이 존숭받는’ 무서운 여신이 되었다. 노역의 영광스런 결말이 퀴프리스의 계략 가득한 도움에 달려있다는 피네우스의 예언은 작품이 끝나고도 유효한 것이다.

 하늘 아래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이래 사람이 다닌 모든 곳에는 이야기가 남았다. 아폴로니오스의 서사시는 그들이 세계와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전한다.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그리스의 바다에는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담겨있다. 그 삶이란 강이나 바다 사이, 즉 그들의 땅 위에 있었기에 여행이란 산다는 것이었다. 고요히 몇 번이고 밤이 내려, 지난 시대를 영원히 돌이킬 수 없도록 경계를 갈라도 이야기로서 죽지 않는 민족인 고대인들은 몇 번이고 모래톱을 건너고 배를 띄운다.


─참고도서
[아르고호 이야기],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 강대진, 작은이야기, 2010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숲, 2009
[오뒷세이아], 호메로스, 천병희, 숲, 2006